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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가역

    2024/5/9 – 7/13

    참여 작가 : 구우희, 미소

    상실의 이미지

    모든 상실은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다. 우리가 알거나, 또는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름들에는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존재했다. 너무나 소중해서 자주 불렀던 이름일수록, 그 이름이 자아낼 수 있었던 의미의 가짓수만큼을 우리는 남겨진 시간동안 침묵하게 된다. 그렇기에 상실이란 언어를 빼앗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장례식장에 걸릴 고인의 영정을 준비할 수 있었던 죽음, 유족이 천천히 추모사를 준비할 수 있었던 상실은 차라리 자비롭다. 예기치 못한 젊은 또래의 상가(喪家)를 찾아야 할 때, 그 과정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는 오열하는 유족—그 감정은 읽을 수도 없고, 이해 불가능하기에 우리의 사고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의 모습이 아니다. 보는 이의 정동(情動)을 가장 뒤흔드는 것은, 영정의 자리를 대신한 앳된 증명사진인 것이다. 그 나이대가 흔히 그렇듯, 소소히 꾸미고 살짝 보정도 곁들인, 어색한 미소의 얼굴. 그것이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속에서 입시나 취업을 위해 찍은 것이었을지, 혹은 해외여행에 부푼 꿈을 안고 여권에 싣기 위해 찍은 사진이었을지 알 길은 없지만, 그 사진이 그날 그곳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친구의 정지된 사진은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 시간이 고정되었음을, 그리하여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사진의 본질을 죽음이라 했던 것을 증명한다.1

    재현의 방식

    죽음은 우리로서는 손 쓸 방도가 없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에 어떤 죽음은 쉽게 잊히거나, 조롱받거나, 때로는 존재조차 부정당하면서도 거대한 멍울이 되어 비애와 함께 격정적 분노마저 세상에 풀어둠으로써 조금씩 역사를 분기(分岐)시켜왔다. 어느 시대는 그 멍울이 김주열이나 전태일, 김경숙의 이름을 가졌고, 또 박종철이자 이한열이었으며, 때론 제주, 마산, 광주의 지명을 빌리기도 했다. 현재의 시간에도 이한빛, 김용균, 이선호, 구의역의 김모(某)…와 같은 이름들은, 견딜 수 없는 부재(不在)의 무게를 통해 망각하려는 힘 앞에서 거센 저항을 시도한다. “잊지 않겠다”는 그 평이한 말들이 반복되는 것도, 그런 반작용일 것이다.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잔혹함, 비참함, 떠나간 이의 흔적이나 남겨진 자들의 고통처럼 어떤 상실을 표상하기 바쁜 이미지들은 상징화되어 남겨지곤 한다. 트라우마적 이미지들은 매스미디어와 소셜미디어를 막론하고 여러 매체에 의해 세상에 퍼지고, 아카이브되며, 도상화된다. 그러나 죽음과 상실, 애도를 야기한 전쟁, 참사, 재난, 폭력의 이미지는 얼마나 실존적인가? 거기에 스러진 이들의 삶과 죽음이 제대로 투영되어 있으며, 우리에게 그 상실의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 우리는 편집된 단편만을 훑으며 세상과 그 정치를 아노라 젠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참사에서 사망자 159명이니, 304명이니 하는 식의 무정한 숫자로 망자를 세는 표현 방식이 이름들을 숫자 뒤로 감추어—때때론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수식어를 덧붙여—우리의 죄악감을 덜어내고 망각을 조장하는데 일조하는 것처럼.

    상실에 기인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대체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2 미술은 이런 재현불가능성(irreproducibility)에 대해 계속 말해왔다. 근대 회화의 소실점(vanishing point)과 원근법은 재현불가능성을 극복하고 세계를 담고자했던 시도였다. 실제 세계에선 서로 평행하여 만날 수 없는 선들을 평면 위의 하나의 점으로 뭉치도록 했고, 그리하여 우리는 평면으로 담을 수 없는 것을 마치 실재인양 그려낼 수 있다. 필름 매체에 이르러,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은 몽타주(montage), 즉 연속되는 이미지와 이미지 간의 병치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 의미들을 불러내고 연결함으로써 또 다른 재현의 가능성을 열었다. 동시대에서 미술의 양상과 그 모습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변함없이 주목해야할 것은 우리가 지닌 취약성(vulnerability)의 한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시도하는 방법론이다.3

    이번 전시 《비가역》의 참여 작가 구우희와 미소는 공통적으로 ‘몸’을 소재로 가져와 상실을 재현하려 하지만, 그 방향성은 서로 다르다. 구우희가 뒤틀리고 조각난, 차갑게 식은 육신을 만들고, 어떤 제의(祭儀)적 형상으로 배치하는 일련의 설치 방식은, 상징화된 죽음에서 시신을 되찾아 오는 장례와 닮았다. 미소에게 신체의 피부는 삶(생명)의 서사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이미지이다. 쉽게 다치고 트는 사람의 피부는, 그 취약함을 흉터로 바꾸어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증언한다. 

    구우희

    구우희는 인간의 취약성, 위태로움을 이미지의 전면에 내세운다. 그에 의해 빚어진 몸의 형상은 마치 무언가가 ‘되다 만’ 것처럼 일그러지거나, 사지가 온전치 않고, 얼굴이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있다. 인간의 얼굴은 곧 이름이며, 서사이고, 우리가 인간성을 갖게 하는 시작점이다. 얼굴이 제거된 육신은 표정을 지을 수도, 대화를 할 수도, 시선을 교차할 수도 없다.4

    작가는 그것들을 이불에 감싸 안겨,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장례와도 같은 의식적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조각나고 파편화된 육신은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같이 부순다. 그렇기에 ‘부분 주검’으로는 온전한 장례가 기능할 수 없다. 작가의 ‘장례할 수 없는 장례’는, 죽음과 상실을 둘러싼 무정한 이미지만 존재하는 상태와 다르지 않다. 오롯이 애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흩어진 육신-얼굴이자, 인간성-을 되찾아야 한다. 

    미소

    미소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표피를 관찰하고, 그곳에 쌓인 시간을 회화로 담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청자(聽者)로서 증언을 듣는 작가 본인의 역할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다는 것은, 삶의 불확실한 기억을 토대로 한 증언을 ‘믿어’줌으로써, 그 화자(話者)들을 세계에 지속시키는 행위이다. 그래서일까, 미소의 작업은 그들의 세계를 지키려는 부단한 노력처럼 보인다.

    바르트는 애도에 ‘일상으로의 회귀(화해)’라는 결말이 있다는, 프로이트적 해석을 거부했다.5 그것은 너무 급하게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미소의 작업은 바르트적 애도와 비슷하다. 우리 몸의 주름, 새겨진 흉터, 튼살을 되돌릴 수 없듯, 애도 역시,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6 그렇기에 미소가 ‘왜 기억하려 하는가’는 굳이 질문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저 살아있는 자의 의무같은 것이니까.


    1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29


    2 “트라우마는 몸에 직접 각인되어 그 경험을 언어적으로 작업하여 해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트라우마의 경험은 서사가 불가능하다.” 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변학수, 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4), 359


    3 재현은 선행하는 현실을 끝없이 뒤쫓는 행위이며, 현실은 이미지로 결코 재현되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재현된다.


    4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와의 관계를 ‘얼굴’에 비유했었다. 타인의 얼굴은 나의 통제가 닿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표정을 지닌 채, 두 눈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갖고 있다. 타인의 얼굴은 나에게 윤리적 명령을 내리고, 내가 그 명령에 책임감을 갖게 함으로써 윤리를 지속시킨다. “얼굴은 […] 죽음을 앞둔 타자로, 죽음을 꿰뚫어 보며 죽음을 드러낸다. 둘째로 얼굴은 혼자 죽지 않게 해달라고 나에게 요청하는 타자이다. 마치 그를 혼자 죽게 하면 그의 죽음에 공범이 되기라도 하듯이. 그래서 얼굴은 나에게 말한다. 살인하지 말지어다.” Emmanuel Levinas and Richard Kearney, “Dialogue with Emmanuel Levinas,” in Face to Face with Levinas, Albany: SUNY Press, 1986, 23-4,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190에서 재인용


    5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애도는 다시 기존의 시스템으로 회귀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바르트는 그것을 비판하며 시스템에 통합되기를 거부한다. 프로이트와 달리 그에게 애도는 종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애도는 중단 없는 지속, 끝없는 연속이다.” 김화임, 「조지 타보리의 『식인종들』에서의 애도와 치유」, 『독일언어문학』 80(2018): 72


    6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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