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30 – 08/10
참여 작가 : 김덕희 구윤지












일본의 근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문학론>을 집필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포기하고야 말았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저열하기까지 한 지탄을 무릅쓰고 ‘Cogito, ergo sum’을 외쳤다.1 나쓰메 소세키가 <문학론>을 포기하기까지, 데카르트가 이른바 ‘Cogito’를 외치기까지 많은 시간을 고뇌해야 했다. 이 ‘포기’와 ‘언설’에는 상관성이 존재한다. 동시대 해당 사회에서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저 너머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저 너머의 세계’와 ‘지금, 여기’ 사이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경계를 사유한다는 것!
역사의 결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예술가와 철학자, 과학자들은 그들이 한결같이 겪어야 했던 ‘벽’의 존재, 그리고 그 벽 너머의 세계를 일깨워주었다. 그사이에 존재하는 그들의 ‘고뇌’는 쉽게 잊힌다. 우리는 결과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그들의 ‘고뇌의 시간과 공간’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저자의 죽음’에서 얘기했던 ‘행간’을 떠올리게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고뇌의 시간과 공간은 ‘문학의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데카르트는 ‘에고(ego)’의 존재를 확연히 발견함으로써 소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에피스테메(episteme) 지층 사이의 행간과 같은 여백이 되었다.2
이렇게 벽은 ‘행간’이나 ‘여백’으로도 존재한다. 행간과 여백은 텅 비어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벽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로 존재하고 끊임없이 공간의 구획으로 배치되며, 동선을 만들고, 저쪽에 대한 상대성을 이룬다. 행간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문장의 내용을 상상의 일루전(illusion)으로 채우는 공간이며, 문장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산수(山水)의 여백은 먹물이 가지 않았음에도 풍경의 자태들이 암시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오히려 이러한 경계에 대한 사유는 물리적인 목격보다 더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
사실 거창한 얘기는 아니다. 필자가 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관찰해야 할 두 작가의 작품에서 행간과 여백을 보려는 시도이다. 작가 김덕희와 구윤지는 그들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 모든 환경이 다르다. 연배나 경험의 차이도 물론 존재한다. 쉽게 얘기해서 그들의 작품은 많이 다르다.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하나의 전시, 같은 공간에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 또한 던질 수 있다. 이 전시를 기획한 필자는 그들 작품의 상당한 차이점에도 주목했다. 왜냐하면 각자의 작품이 서로의 내용이 되었다가 때로는 배경이 되어야 하는 유기적인 상관성을 접합해 보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그들의 작품이 마치 어느 간섭도 용납하지 않는 무균실 인큐베이터(같은 곳)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가 김덕희와 구윤지의 접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두 작가는 많은 부분에서 인간의 생리, 생체를 소재로 다룬다. 구윤지의 작업은 우리 눈이 포착할 수 없는 미시세계를 확대하여 가시(可視)의 상태로 바꾼다. 그녀의 작품은 전형적인 모더니즘적 제작기법에 의존한다. 금속판에 실크스크린으로 이미지를 전사(프린트)시키는 방법은 틀에 의존하는 그림이라는 익숙한 형태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지금 구태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들의 가장 적합한 매개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구윤지의 작업에 Muscles project_close up이라는 표제가 알려주는 것은 결정적인 단서들이다. 인체, 근육, 근섬유, 세포와 같은 단어들에서 우리는 특정할 대표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한다. 작가는 현미경이라는 보족(補足) 매개를 통하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시각성, 다시 말해 미시적 풍경을 말하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얻은 추상 이미지는 우리 몸의 일부, 그것도 상상으로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구체적 대상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더없이 낯선 이미지가 된다. 추상회화 이미지의 익숙함에서 근섬유, 세포의 확장된 이미지로 인식이 옮겨가는 동안 익숙함은 생경함으로 전이 된다. ‘벽’의 경험이며, 반응하는 ‘행간’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구윤지의 추상회화는 우리 눈을 감성으로 안아주면서 아름다운 작품으로 회귀한다.
작가 김덕희의 작업은 구윤지와는 확연히 다른 과정과 결과를 만든다. 김덕희의 작업은 유형을 정의할 수 없이 다양하다. 미디어를 다루고, 조각적 입체물이 나오기도 하며, 사물이 등장한다. 매우 개념적이며 서사적이다. 김덕희의 작업들은 시간을 공유한다. 감상 주체와의 반응을 통해 완성되는 것도 다분하다. 멋지고 경이로운 눈요기 감은 없다. 때로는 기다려야하고, 때로는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역시 우리의 경험을 동원해야 하며, 감성과 지식을 결합해야 한다. 김덕희 작품의 대부분은 언어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오브제의 등장은 우리 일상의 삶 전체를 지시한다. 철제 침대가 그렇다. 하지만 작품의 효과가 가져다줄 결과는 단순히 ‘아름다운 작품’으로 귀결되는 것을 허락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위험한 침대’가 되어 근접해 가거나 접촉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 손 형태의 조각 작품은 감상자가 그저 관찰자만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조각은 실제로 만져야 반응하는 것이고, 체온을 느낌으로써 완성되는 작품이다. 이른바 다가가고 건드려야 한다. 그러니 김덕희의 작업은 모더니즘 이후의 감성과 미감을 따라가야 한다. 그럼에도 두 작가의 작업은 ‘저 너머’ 또는 ‘경계의 밖’을 지시한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모두가 아닌 상상과 경험으로 귀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좀 오래된 에세이 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비평가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는 ‘알레고리(allegory)를 창출하려는 충동’에서 중세 이콘(icon)화가 성경을 가리키고 신앙심을 고취하려고 했던 기능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동시대 미술에도 이미지 이면의 상상의 세계를 지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며, 그것이 여전히 좋은 작품으로 유효하다고 했다. 이콘이 기독교 세계를 지시했다면, 김덕희와 구윤지의 작품은 롤랑 바르트의 ‘행간’에서 발생하는, 독자 개인의 상상으로 빚어지는 ‘새로운 창작물’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우리는 기획전 ‘생체(生體)’의 경계, 그 너머의 생체’ 전(展)에서 익명성과 낯선 풍경들을 만나야 한다.
부산을 연고로 하는 두 젊은 여성작가의 섬세한 감각과 창의적인 상상력을 새롭게 경험할 기회라 할 것이다.
(글/김영준 기획자)
1)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잘 알려진 문장으로, Cogito(생각, 사유, 성찰)를 통해 ‘나’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기독교적 사유세계관을 청산하는 최초의 신호로 볼 수 있다.
2) episteme(에피스테메) :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인식론)를 에피스테메라 칭했다.
